REVIEW

불타는 세계시리 허스트베트 저 | 김선형 역

장동석의 여성·책읽기

시리 허스트베트 『불타는 세계』…사유와 감수성의 벽을 넘다


혁명과도 같은 모험 시도한

여성 예술가의 삶 파고들어



▲ 『불타는 세계』


시리 허스트베트는 국내 독자들에게 널리 알려진 작가는 아니지만, 알고 있다고 해도 유명 작가 폴 오스터의 부인으로 기억하는 사람이 많다. 시리 허스트베트는 미국 평단이 주목하는 걸출한 작가다.

최근 국내에 소개된 『불타는 세계』는 “소설이라는 형식 자체가 품고 있는 거대한 가능성을 탐구하는 작가”라는 평에 걸맞은 작품으로, 모든 것을 가졌지만 아무것도 갖지 못한 한 여인의 삶을 적나라하게 파고든다.

해리엇 버든은 구두쇠지만 나름 부유한 유대인 부모 사이에 태어난 “엄청난 지성과 천재적인 미적 감각을 겸비한 예술가”였다. 하지만 뉴욕 미술계를 손바닥 안에 놓고 있는 거부 미술상, 그것도 스물두 살이나 많은 남편 펠릭스와 결혼한 후로는 아내이자 남매의 엄마로 본인의 욕망은 꽁꽁 억누른 채 살아간다.

“아내로서의 내가 화가로서의 나를 압도”했던 것이다. 더욱이 남편은 갈등이라면 사소한 것 하나도 싫어하는 성격 탓에 해리엇이 주변 사람들에게 예술적 취향을 드러내는 것조차 극도로 막았다. 숨 쉴 틈조차 없는 나날이 이어졌고, 침묵은 무기한 길어졌다. 심연의 분열은 깊어만 갔다.

남편이 죽었다. 이내 해리엇은 모험을 감행한다. 적잖은 나이, 예순둘이었지만, 해리엇은 이 모험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모험의 실체는 책에서 확인하시라고 권한다. 다만 밝힐 수 있는 것은 평생 내면의 욕망을 억제했던 자신의 삶에 일대 혁명을 가져온 일인 것만큼은 분명하다.

이것만은 밝힐 수 있겠다. 그 혁명과도 같은 일은 평생 억압당했던 자신만의 예술적 취향과 지식, 감성을 모두 드러내는 것이었다.

『불타는 세계』의 구성을 독특하다. 해리엇 한 사람의 시점으로 끌어가지 않고, 주변 인물들의 갖가지 증언, 이를테면 녹취록 편집본이나 서면 진술 등을 통해 해리엇의 과거와 현재, 미래를 조명한다. 어떤 대목은 몇몇 사람의 대화를 고스란히 옮기면서 이 작품이 소설인가 하는, 의구심까지 들게 한다. 그럼에도 각각의 내용이 하나의 짜임새를 이루면서 “경계를 가로지르는 지적인 사유”를 보여준다.

새로운 소설 형식에 대한 감탄이 주는 울림도 크지만 사실 『불타는 세계』의 주인공 해리엇이 자신을 찾아가는, 일종의 자아 찾기가 이 작품의 가장 큰 미덕이다. 세상 대부분 사람이 풍족하지 못한 시대에, 가질 것 다 가진 중년 여성의 자아 찾기가 뭐 그리 대단하냐고 타박할 수 있지만, 해리엇은 이마저도 전복한다.

그것은 평생 내 삶이겠거니 살아왔던 사람들이 보일 수 있는 평범하고 순진한 일탈이 아닌, 내면의 세계를 넓히는 동시에, 그가 사랑한 예술의 지평을 넓혀가는 과감한 일이었다. 하나의 퍼즐을 맞추면 새로운 퍼즐이 등장하는 세계에서, 인간이라면 모두가 가져야 할 두려움을 전혀 새로운 방식으로 돌파한 것이다.

분명 『불타는 세계』는 생소한 작품이다. 앞뒤의 조합을 다시 맞춰야만 드러나는 다양한 구성 또한 읽는 이들의 마음을 불편하게 할 수 있다. 하지만 끝까지 읽고 나면 『불타는 세계』가 근래 읽은 가장 흥미진진한 책이라고 고백할지도 모를 일이다. “사유와 감수성의 벽”을 넘는 새로운 지적 소설을 찾는다면 단연 『불타는 세계』를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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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84호 [북리뷰] (2016-04-05)

장동석 출판평론가